목회칼럼(권순혁목사) 1 페이지

본문 바로가기

목회칼럼(권순혁목사)

Total 98건 1 페이지
  • 98
    아름다운교회 Oct 11.2026 어디까지가 하나님, 어디까지가 내가 해야 하는 것인가요
    살다 보면 어디까지가 하나님의 몫이고 어디서부터가 내 몫인지 헷갈릴 때가 많습니다. 열심히 앞서 나가면 "내가 하나님보다 앞서가는 건 아닌가" 싶고, 한 걸음 물러나 맡기면 "나는 아무것도 안 하고 하나님께 떠넘기는 건 아닌가" 싶습니다. 이런 흔들림의 밑바닥에는 대개 하나님과 내가 일을 반반 나누어 한다는 생각, 곧 50대 50의 마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궁금증에 대해 신학교에서 "하나님이 100, 사람이 100"이라고 배웠습니다. 처음 들으면 계산이 안 맞는 말 같습니다. 그런데 이 말은 일을 나누는 비율이 아니라 일이 이루어지는 구조를 설명합니다. 돛단배를 떠올려 보면, 배를 앞으로 나가게 하는 힘은 바람입니다. 사공은 바람을 만들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사공이 할 일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돛을 올리고, 방향을 잡고, 키를 놓지 말아야 합니다. 바람이 아무리 불어도 돛을 내려 두면 배는 제자리에 있습니다. 사공이 아무리 애써도 바람이 없으면 배는 가지 않습니다. 그러니 이 배가 가는 일은 바람 50에 사공 50이 아닙니다. 바람은 처음부터 끝까지 100% 필요하고, 사공도 처음부터 끝까지 100% 필요합니다. 둘 중 하나라도 0이면 결과도 0입니다. 한쪽이 많이 하면 다른 쪽이 줄어드는 관계가 아니라, 한쪽이 온전히 하는 일 안에서 다른 쪽도 온전히 하는 관계입니다. 성경에서 이것을 가장 잘 보여준 사람은 느헤미야였다고 생각합니다. 무너진 예루살렘 성벽을 다시 쌓던 중 대적들이 습격을 모의하자, 느헤미야는 이렇게 대응합니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께 기도하며 그들로 말미암아 파수꾼을 두어 주야로 방비하는데"(느 4:9). 기도만 했다면 하나님께 맡기고 손을 놓은 것이고, 파수꾼만 세웠다면 자기 힘을 믿고 앞서간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둘 다 온전히 했습니다. 바울도 같은 고백을 합니다.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수고는 분명히 바울이 했는데, 그 수고를 가능하게 한 것은 은혜였다는 말입니다. 이 구조를 알면 두 가지 불안에 답할 수 있습니다. "내가 앞서가는 건 아닐까?" 앞서간다는 것은 내가 너무 많이 해서가 아닙니다. 바람의 방향을 묻지 않고 내 방향대로만 달리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며 방향을 묻고 있다면, 최선을 다하는 것은 앞서감이 아니라 순종입니다. "내가 너무 맡기기만 하는 건 아닐까?" 돛은 올리지 않은 채 바람만 기다리고 있다면 그것은 진정한 믿음이 아닙니다. 느헤미야는 기도한 뒤 곧바로 파수꾼을 세웠습니다. 맡긴다는 말은 내 몫을 내려놓는다는 뜻이 아니라, 결과를 내려놓는다는 뜻입니다. 돛을 올리는 일은 내 몫이고, 바람이 부는 일은 하나님의 몫입니다. 오늘도 기도로 바람을 구하고, 손으로 돛을 올리며 살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Read More
  • 97
    아름다운교회 Oct 04.2026 반복되는 문제 앞에서 마음 돌아보기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 7:21) 열매로 알 수 있다고 하신 주님의 이 말씀은 묵상할 때마다 가슴을 멈추게 합니다. 이 말씀은 주님 앞에서 "주여 주여" 하던 당시 사람들에게도, 오늘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에게도 충격적인 말씀입니다. 주님을 부르는 것과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이 같지 않을 수 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이 진리를 부인할 수 없는 이유는, 우리의 삶은 마음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를 보여주는 분명한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마음을 감추고 겉으로만 선하게 행동할 수도 있습니다. 한동안은 사람들의 눈을 속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동기가 바르지 않은 선행은 오래 가지 못합니다. 과수원을 떠올려 보면 쉽게 이해가 됩니다. 뿌리에 병이 든 나무가 있다고 해 봅시다. 그 나무에 먹음직스러운 열매 몇 개를 끈으로 매달아 놓으면 멀리서 보기에는 건강한 나무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계절이 바뀌면 달라집니다. 매달아 놓은 열매는 시들어 떨어지고, 나무는 해마다 작고 상한 열매만 맺습니다. 아무리 가지를 손질하고 겉모습을 가꾸어도 문제가 반복되는 이유는 가지가 아니라 뿌리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이와 닮았습니다. 인정받고 싶은 마음, 책임을 피하고 싶은 마음, 해결되지 않은 상처가 뿌리에 남아 있으면, 아무리 좋은 행동을 해도 같은 문제가 반복적으로 삶에서 드러납니다. 관계에서 늘 비슷한 갈등을 겪고, 섬기는 자리에서 비슷한 이유로 지치고 낙심하는 모습이 그렇습니다. 저 역시 선한 행동을 하면서도 마음의 동기가 바르지 않을 때 좋은 열매로 이어지지 않는 제 자신의 모습을 여러 번 보았습니다. 주님은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셨습니다. 열매를 억지로 매달아 놓는다고 나무가 달라지지는 않습니다. 농부는 열매가 부실할 때 열매를 탓하지 않고 땅을 살피고 뿌리를 돌봅니다. 우리의 농부이신 하나님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열매를 꾸미는 일이 아니라 뿌리를 돌아보는 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반복되는 나의 문제들에 대해 하나님은 "왜 또 그랬니"라고 지적하기보다 "너의 마음에는 무엇이 있니"를 물어보실 것입니다. 이 질문은 정죄하려는 것이 아니라 회복으로 초대하는 것입니다. 좋은 농부이신 주님은 우리 마음의 땅을 가장 잘 아시고, 그 땅을 갈고 가꾸기를 기뻐하십니다. 우리가 마음을 내어드릴 때, 열매는 애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오늘 내 삶에 맺힌 열매를 살펴보며, 그 뿌리에 주님이 계신지 조용히 물어보는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
    Read More
  • 96
    아름다운교회 Sep 27.2026 "예수의 길" 시리즈 설교를 마치면서
    마가복음이 그려내는 예수님의 여정은 언제나 예루살렘과 십자가를 향해 묵묵히 걸어가시는 '길 위의 걸음'이었습니다. 그동안 마가복음을 통해 주님이 걸으신 길을 함께 따라가 보았듯, 세상은 더 넓고, 더 화려하며, 눈앞의 성공이 확실히 보장된 대로를 향해 달려가라 말합니다. 그러나 마가가 증언하는 참된 승리와 영광의 길은 세상의 흐름과 전혀 다른 방향, 즉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아가는 그 작고 좁은 길 위에 있었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주님이 친히 걸으시며 놓으신 그 길은 찾는 이가 적지만, 영원한 생명으로 통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마가복음 속 예수님의 공생애는 늘 길 위에서 수많은 사람들과의 만남으로 가득했습니다. 병 고침을 바라는 무리, 오병이어의 기적에 환호하는 군중이 주님의 주변을 가득 메웠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을 향한 십자가의 길목에서,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해야 할 것"이라는 주님의 선언 앞에서는 제자들조차 주춤했습니다. 심지어 십자가라는 결정적인 절망의 순간, 수제자를 비롯한 남성 제자들은 모두 주님을 두고 달아났습니다. 역설적이게도 그 길의 끝, 가장 비참한 십자가 밑을 끝까지 지킨 이들은 이름도 없이 주님을 섬기던 여인들이었고, 무덤가에서 떨며 서 있던 이들이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능력을 좇던 화려한 무리와 참된 제자의 거리는 이토록 멀었습니다. 예수의 길은 눈에 보이는 환경이나 장담할 수 있는 인간의 의지로 걸어가는 길이 아닙니다. 밤하늘의 별을 보고 항해하는 선원처럼, 손에 잡히지 않아도 약속의 오직 주님을 바라보는 믿음으로만 걸어갈 수 있는 길입니다. 마가복음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가장 큰 위로는, 절망과 실패로 무너진 제자들을 향해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만나리라”고 하시면서 주님이 우리를 실패의 자리에서 다시 일으켜 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길은 완벽한 사람들의 완주기가 아니라, 나의 한계를 인정하고 보이지 않는 주님의 은혜를 의지하는 믿음의 여정입니다. 마가복음으로 이어온 이 예수의 길을 마무리하며, 오늘 우리는 스스로에게 엄숙한 질문을 던져보아야 합니다. 나는 그저 기적에 환호하며 주변을 서성이는 ‘무리의 안도감’에 만족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십자가 밑까지 주님의 뒤를 따라가는 ‘제자의 걸음’을 옮기고 있습니까? 내 삶이 무너지고 실패한 자리에서도, 나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셔서 기다리시는 주님의 보이지 않는 손을 믿음으로 붙들고 있습니까? 남들이 찾지 않는 외롭고 험한 길일지라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의 발자취를 밟아가는 그 길 끝에는 마침내 부활의 승리와 영광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세상의 화려한 이정표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실패의 자리에서도 다시 일어나 오직 믿음으로 주님과 묵묵히 동행하는 참된 제자의 삶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Read More
  • 95
    아름다운교회 Sep 20.2026 울타리 너머에도 흐르는 하나님의 은총
    교회 안에서 우리는 '은혜'라는 말을 자주 하지만, 그 은혜를 지나치게 좁은 통로로만 이해할 때가 많습니다. 십자가에서 완성된 구원의 은총, 곧 특별은총만이 하나님의 유일한 활동이라고 생각하면 신앙은 어느새 울타리가 되고, 교회는 세상과 담을 쌓은 섬이 될 수 있습니다. 기독교가 배타적인 종교로 비치는 이유는 복음의 내용 때문이라기보다, 그 복음을 주신 하나님을 너무 작게 묵상해 온 데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성경이 증언하는 하나님은 구속의 하나님이기 전에 창조의 하나님이시며, 구원하시는 분이기 전에 만물을 붙드시는 분이십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긍휼이 그분이 지으신 모든 것 위에 있다고 노래했고(시 145:9),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고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 5:45). 바울은 아테네에서 하나님이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모든 것을 친히 주시는 분이라고 선포했습니다(행 17:25). 복음을 들어 본 적 없는 이의 식탁에 오른 밥, 신앙 없는 의사의 손에서 회복된 생명, 그리스도를 모르는 예술가가 빚어낸 아름다움도 모두 하나님의 손길 안에 있습니다. 개혁신학에서는 이것을 일반은총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은 이방 왕 고레스를 '기름 부은 자'라 부르며 쓰셨고(사 45:1), 살인자 가인에게조차 보호의 표를 주셨습니다(창 4:15). 물론 일반은총이 곧 구원은 아니다. 해와 비를 누리는 것과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얻는 것은 다릅니다. 그러나 두 은총은 서로 다투지 않습니다. 특별은총은 일반은총이 떠받치는 무대 위에서 펼쳐지며, 둘은 한 하나님의 한 경륜 안에서 이어집니다. 칼빈이 이교 저술가들의 진리조차 성령의 선물로 인정했던 것도, 카이퍼가 만물 가운데 그리스도께서 "내 것"이라 하지 않으실 영역은 단 한 뼘도 없다고 고백했던 것도 이 때문인 것이죠. 일반은총을 묵상하는 그리스도인은 다르게 삽니다. 신앙이 다른 이웃의 성실함과 친절 앞에서 그것을 '아직 구원받지 못한 사람의 착함'쯤으로 깎아내리지 않고, 하나님이 그에게도 허락하신 선물로 알아보고 감사합니다. 다른 신념을 가진 이와의 대화에서 방어하기보다 배우며, 복음을 전하되 정복하려 들지 않습니다. 자신이 서 있는 자리가 공로가 아니라 은총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이미 일하고 계신 세상 속으로 초대받았음을 아는 사람은 겸손하면서도 담대합니다. 교회의 문이 좁아 보인다면, 복음이 좁아서가 아니라 우리의 하나님 이해가 좁아서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교회 안에서만 일하시는 분이 아니라, 교회를 세우신 그 손으로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분입니다. 오늘 아침 우리를 비춘 햇빛은 모든 사람 위에 똑같이 내렸음을 좀 더 깊이 묵상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Read More
  • 94
    아름다운교회 Sep 13.2026 믿음으로 살되, 상식을 잃지 않는 삶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믿음으로 산다"는 말을 자주 듣고, 또 그렇게 살고자 애씁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보게 하고,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신뢰하게 만드는 힘입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믿음"이라는 말을 상식과 대립되는 개념처럼 사용하는 데 익숙해진 듯합니다. 마치 상식적으로 판단하면 믿음이 부족한 사람이 되고, 무모하게 결단해야만 믿음이 좋은 사람이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믿음의 사람들은 결코 상식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느헤미야는 성벽 재건을 기도로 시작했지만, 동시에 파수꾼을 세우고 무기를 든 채 일했습니다(느헤미야 4장). 바울은 복음을 전하면서도 로마 시민권을 활용했고, 위험한 상황에서는 지혜롭게 피하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조차도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마태복음 10:16)고 말씀하셨습니다. 믿음과 지혜, 믿음과 분별은 결코 상충되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가야 할 두 축입니다. 요셉의 삶은 이 균형을 더욱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주신 꿈과 소명을 믿었지만, 애굽의 총리가 되어서는 7년의 풍년 동안 곡식을 체계적으로 저장하는 지혜로운 행정을 펼쳤습니다(창세기 41장). 만약 요셉이 "하나님이 알아서 하시겠지"라며 아무 대비도 하지 않았다면, 그 땅과 많은 백성이 흉년 가운데 살아남지 못했을 것입니다. 또한 잠언 기자는 "지혜로운 자는 재앙을 보면 숨어 피하여도 어리석은 자는 나아가다가 해를 받느니라"(잠언 22:3)고 말하며, 분별력 있는 삶이야말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의 자연스러운 열매임을 가르쳐 줍니다. 사도행전 15장의 예루살렘 공의회 역시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하면서도, 지도자들이 함께 모여 논의하고 합의에 이르는 상식적인 절차를 따랐습니다. 상식을 저버린 믿음은 때로 무모함으로, 심지어 무책임함으로 변질될 수 있습니다. 건강을 돌보지 않으면서 "하나님이 고쳐주실 것"이라 말하거나, 재정을 무계획하게 사용하면서 "하나님이 채우실 것"이라 말하는 태도는 신앙이 아니라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에 가깝습니다(마태복음 4:7). 반대로 상식만 있고 믿음이 없는 삶은 하나님의 능력과 인도하심을 배제한 채, 오직 자기 계산과 능력만을 의지하는 삶이 되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성숙함은 이 둘의 균형에서 드러납니다. 우리는 기도하며 하나님을 신뢰하되, 동시에 주어진 지혜와 분별력을 활용하여 신중하게 결정해야 합니다. 결국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상식을 초월하는 것이 아니라, 상식을 하나님께 드려 그 안에서 지혜롭게 활용하는 것입니다. 삶의 크고 작은 결정 앞에서, 우리가 무모함이 아닌 신중함으로, 그러나 두려움이 아닌 신뢰함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믿음과 상식은 서로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손잡고 우리를 온전한 그리스도인의 삶으로 이끌어가는 두 날개입니다.
    Read More
  • 93
    아름다운교회 Sep 06.2026 함께 예배하는 것이 큰 기쁨입니다!
    다윗은 예루살렘 성문 앞에 서서 사방에서 몰려오는 백성들을 바라보았습니다. 지파마다, 마을마다,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걸어 나온 이들이 한 방향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예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짐을 지고 오는 이도 있었고, 노래하며 오는 이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발걸음은 결국 하나였습니다. 여호와의 집으로 올라가는 발걸음이었습니다. 그 광경 앞에서 다윗은 기쁨을 억누르지 못하고 노래했습니다.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시 122:1). 왕의 자리에 앉은 다윗이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그 어떤 왕관보다도 성전으로 향하는 백성들의 발걸음이 그의 마음을 가득 채웠을 것입니다. 저는 이 다윗의 마음을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습니다. 주일 아침, 교회 마당으로 걸어 들어오는 성도님들의 모습을 볼 때마다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어떤 이는 한 주간의 피로를 채 씻어내지 못한 얼굴로, 어떤 이는 걱정을 가슴 한편에 담은 채로, 또 어떤 이는 감사와 기쁨이 넘치는 얼굴로 걸어옵니다. 저마다의 사정은 다르지만, 그들이 향하는 곳은 하나입니다. 마치 여러 골짜기에서 흘러나온 시냇물이 저마다 다른 길을 지나왔지만 결국 하나의 강으로 모여들듯, 이번 한 주도 각자의 자리에서 씨름하며 살아온 성도님들이 마침내 같은 자리, 같은 예배로 모여듭니다. 그 물줄기가 모여 도도한 강을 이루는 광경 앞에서, 저는 목회자로서 벅차오르는 기쁨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압니다. 제가 느끼는 이 기쁨은 하나님이 느끼시는 기쁨의 아주 작은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것을요. 목자가 양 떼를 세어보며 한 마리도 빠지지 않았음을 확인할 때 느끼는 안도와 감격처럼,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 한 사람 한 사람이 세상의 분주함을 뚫고 예배의 자리로 돌아오는 그 순간을 그 누구보다 기뻐하고 계실 것입니다. 탕자를 기다리던 아버지가 저 멀리서 걸어오는 아들의 실루엣만 보고도 달려나갔던 것처럼(눅 15:20), 하나님은 우리가 미처 성전 문턱을 넘기도 전에 이미 우리의 발걸음을 알아보시고 기뻐하고 계실 것입니다. 아버지는 자녀가 집으로 돌아오는 발소리를 그 무엇보다 먼저 알아채는 법이니까요. 다윗은 왕이었지만 그 기쁨 앞에서는 그저 한 사람의 예배자였습니다. 저 또한 목회자이지만, 주일 아침 몰려오는 성도들 앞에서는 그저 하나님의 그 크신 기쁨을 함께 나누고 싶은 한 사람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오늘도 성전 문 앞에 선 다윗처럼, 몰려오는 성도님들의 발걸음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그 크신 기쁨에 작게나마 동참하려 합니다. 그리고 이 기쁨이 저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 그 발걸음을 옮기는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에도 함께 흐르기를 소망합니다. 함께 예배하는 것이 큰 기쁨입니다!
    Read More
  • 92
    아름다운교회 Aug 30.2026 부족함이 은혜를 채우는 통로입니다
    완벽을 요구하는 시대입니다. SNS 속 사람들은 늘 흠 없이 웃고, 성공하고, 반짝입니다. 우리는 그 틈에서 자꾸만 스스로를 재촉합니다. "더 잘해야 해, 더 완벽해야 해, 부족함을 보이면 안 돼." 그렇게 애쓰다 지쳐버린 우리의 모습이 참 안타깝습니다. 애초에 완벽해질 수 없는 존재인데, 완벽해지려고 몸부림치는 것만큼 서글픈 일이 또 있을까요. 한 아버지가 어린 딸에게 그림을 그려보라고 했습니다. 딸은 삐뚤빼뚤한 선으로 집을 그리고, 하늘은 초록색으로 칠하고, 해는 네모로 그렸습니다. 아버지는 그 그림을 냉장고에 붙여놓고 매일 바라보며 웃었습니다. 딸의 그림이 완벽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 서툰 선 하나하나에 딸의 마음이 담겨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에게 필요한 것은 완벽한 그림이 아니라, 딸이 자신에게 마음을 내어놓았다는 사실 그 자체였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완성된 작품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부족한 채로 나아오는 우리의 마음을 기뻐하십니다. 성경도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하나님은 완벽한 사람을 찾지 않으셨습니다. 부족한 모세를 부르셨고, 연약한 기드온을 세우셨고, 눈물로 무너진 베드로를 다시 일으키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완벽함 위에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빈자리, 우리의 연약함 그 위에 부어집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후 12:9)는 말씀처럼,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가 채워져 있을 때가 아니라 비어 있을 때 가장 온전히 드러납니다. 그래서 교회 공동체가 소중합니다. 세상은 완벽함을 요구하지만, 교회는 연약함을 용납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는 부족함을 감출 필요가 없습니다. 넘어진 이야기를 해도 괜찮고, 아직 다 정리되지 않은 마음을 꺼내 놓아도 괜찮습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너는 내 사랑하는 자"라 말씀하셨고,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완전하다고 선언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애써 완벽해 보이려 하지 않아도, 하나님은 이미 우리를 온전히 사랑하고 계십니다. 공동체는 바로 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닮아가야 할 곳입니다. 서로의 부족함을 지적하고 경쟁하는 곳이 아니라, 서로의 연약함을 끌어안고 함께 채워가는 곳. 그것이 교회가 세상과 다른 이유입니다. 이번 전교인 별빛수련회의 주제는 "함께, 더 아름답게"(시 133:1~3)입니다. 완벽한 사람들이 모여 완벽한 시간을 만드는 자리가 아닙니다. 오히려 조금 부족하고, 조금 모자란 우리가 함께 모여, 그 빈자리를 하나님께서 채워주시는 은혜를 경험하는 자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각자의 연약함을 숨기지 않고 내어놓을 때, 우리는 비로소 서로에게 더 아름답게 스며들 수 있습니다. 부족해도 괜찮습니다. 연약해도 괜찮습니다. 그 빈자리에 하나님의 은혜가 채워질 때, 우리는 함께, 더 아름다워질 것입니다.
    Read More
  • 91
    아름다운교회 Aug 23.2026 무너질 수밖에 없는 우리, 그래서 기도입니다
    베드로는 자신 있었습니다.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그리하지 않겠나이다"(마 26:33). 그의 결단은 진심이었고, 그의 의지는 뜨거웠습니다. 하지만 그날 밤, 예수님이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자고 하셨을 때 베드로는 한 시간도 깨어 있지 못했고, 결국 새벽닭이 울기 전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했습니다. 우리는 종종 착각합니다. "이번엔 다르다", "나는 굳게 결심했다", "내 의지로 이겨낼 수 있다"고.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정직하게 말합니다. 인간의 결단과 의지만으로는 결코 시험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베드로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그렇습니다. 새해 결심이 작심삼일로 끝나고, 굳게 다짐한 신앙의 결단이 며칠을 넘기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문제는 의지가 약해서가 아니라, 애초에 우리의 힘으로는 넘을 수 없는 벽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에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마 26:41). 여기에 답이 있습니다. 우리의 원함, 곧 의지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육신은 약하고, 세상은 강하고, 유혹은 끈질깁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강한 결심이 아니라, 우리보다 강하신 분을 붙드는 기도입니다. 기도는 우리의 연약함을 인정하는 자리입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혼자 골방에서 드리는 기도도 귀하지만, 함께 모여 드리는 기도에는 또 다른 은혜가 있습니다. 서로의 연약함을 나누고, 함께 무릎 꿇으며 서로를 위해 기도할 때, 우리는 혼자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힘을 얻습니다. 나뭇가지 하나는 손쉽게 부러뜨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 개의 가지를 한데 묶으면, 웬만한 힘으로는 꺾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결단도 이와 같습니다. 홀로 서 있는 의지는 삶의 작은 압력에도 쉽게 부러지지만, 함께 붙들고 함께 엎드리는 기도의 공동체는 서로를 단단하게 지탱해 줍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그렇게 묶인 나뭇가지가 되어야 합니다. 촛불 하나는 작은 바람에도 쉽게 꺼집니다. 그러나 여러 개의 촛불이 함께 모이면, 서로가 서로의 바람막이가 되어 쉽게 꺼지지 않습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홀로 선 결단은 삶의 작은 바람에도 쉽게 흔들리고 꺼지지만, 함께 모여 기도하는 자리에는 서로가 서로를 지켜주는 힘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촛불을 처음 밝히시고 끝까지 지켜주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우리는 스스로의 의지가 아니라, 함께 모여 드리는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무너질 수밖에 없는 우리이지만, 함께 모여 기도할 때 우리는 함께 묶인 나뭇가지처럼, 함께 밝힌 촛불처럼, 결코 꺾이지 않고 결코 꺼지지 않는 믿음의 공동체가 됩니다.
    Read More
  • 90
    아름다운교회 Aug 16.2026 영혼의 양식과 호흡
    우리의 몸은 한 번에 많은 것을 채워 둔다고 해서 일주일을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바쁜 사람이라도 “오늘 일주일치 밥을 한꺼번에 먹어 두고 앞으로 6일 동안은 먹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제 많이 먹었다고 오늘 밥을 먹지 않아도 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몸은 매일 양식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영혼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 4:4)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영혼을 살리는 영의 양식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때때로 주일에 말씀을 들은 것으로 일주일을 살아가려고 합니다. 주일에 은혜를 많이 받았으니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일주일치 밥을 주일에 몰아서 먹을 수 없듯이, 말씀도 한 번에 몰아서 먹을 수 없습니다. 매일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그 말씀을 마음에 담아야 합니다. 성경을 매일 읽는다는 것은 단순히 신앙적인 의무를 하나 수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을 살아가기 위해 하나님께서 주시는 양식을 먹는 것입니다. 때로는 한 장을 읽어도 좋고, 몇 절만 천천히 묵상해도 좋습니다. 중요한 것은 많은 양보다 매일 하나님의 말씀 앞에 앉는 것입니다. 매일 먹는 밥이 우리의 몸을 만들듯, 매일 읽는 말씀이 조금씩 우리의 생각을 바꾸고 마음을 새롭게 하며 결국 우리의 삶을 만들어 갑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는 흔히 영혼의 호흡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아무리 바빠도 숨 쉬는 것을 미루지 않습니다. “오늘은 너무 바쁘니까 저녁에 몰아서 숨 쉬어야겠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호흡이 멈추면 생명이 위태로워지기 때문입니다. 기도 역시 하나님과 연결되어 살아가는 영적 호흡입니다. 또 이런 모습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자동차에 기름이 거의 떨어졌는데 “너무 바빠서 주유소에 갈 시간이 없어”라고 말하며 계속 달린다면 어떻게 될까요? 아무리 중요한 약속이 있고 아무리 바쁜 일정이 있어도 결국 자동차는 길 한가운데 멈추게 됩니다. 오히려 바쁠수록 기름을 채워야 합니다. 우리의 삶도 그렇습니다. 기도할 시간이 없을 만큼 바쁜 것이 아니라, 바쁘기 때문에 더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고 계속 달리는 삶은 언젠가 영적으로 멈춰 설 수밖에 없습니다. 하루의 모든 일이 시작되기 전, 잠시라도 말씀 앞에 앉아 봅시다. 그리고 하나님께 마음을 열어 기도합시다. “주님, 오늘 제게 필요한 말씀을 먹여 주십시오. 오늘도 주님 안에서 숨 쉬게 해 주십시오.”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생각을 배우고,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루를 살아가는 것입니다. 거창한 결심보다 중요한 것은 작은 반복입니다. 매일 먹듯 말씀을 읽고, 매일 숨 쉬듯 기도하십시오. 그렇게 하루하루 하나님과 함께 살아갈 때 우리의 영혼은 건강해지고, 우리의 삶은 조금씩 예수님을 닮아가게 될 것입니다.
    Read More
  • 89
    아름다운교회 Aug 09.2026 성경을 읽으면 인생의 큰 그림이 보입니다
    성경통독을 시작하면 가장 먼저 만나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읽기는 읽는데 무슨 내용인지 잘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창세기와 출애굽기까지는 흥미롭게 읽다가 레위기에 들어서면 속도가 느려지고, 낯선 지명과 사람들의 이름이 계속 등장하면 ‘이것을 꼭 다 읽어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래서 성경통독을 시작한 사람은 많지만 끝까지 완주하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성경을 통독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성경을 통독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조각이 아니라 큰 그림으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퍼즐 한 조각만 들여다보면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기 어렵습니다. 파란색 조각 하나를 보면 그것이 하늘인지, 바다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 조각이 연결되기 시작하면 어느 순간 전체 그림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좋아하는 구절 몇 개만 읽을 때는 발견하지 못했던 하나님의 큰 그림이 성경 전체를 읽어갈 때 비로소 보이기 시작합니다. 창세기에서 시작된 하나님의 구원의 이야기가 아브라함을 지나 이스라엘의 역사로 이어지고, 선지자들의 외침을 거쳐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에게 이르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가 사도행전의 교회를 지나 오늘 우리에게까지 이어지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때 성경은 더 이상 오래된 책이 아니라 지금 나의 삶을 설명해 주는 하나님의 이야기가 됩니다. 성경통독이 주는 또 하나의 유익은 우리의 생각을 하나님의 생각으로 교정해 준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 세상의 수많은 이야기를 듣습니다. 뉴스와 유튜브, SNS와 사람들의 말을 통해 무엇이 성공인지, 무엇이 행복인지, 무엇이 중요한지를 끊임없이 배우고 있습니다. 가만히 있어도 세상은 우리의 생각을 만들어 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읽지 않으면 어느 순간 세상의 가치관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착각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성경을 꾸준히 읽는 것은 마치 나침반을 다시 북쪽으로 맞추는 것과 같습니다. 말씀을 읽으며 “나는 이렇게 생각했지만 하나님은 이렇게 생각하시는구나. 나는 이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다른 것을 중요하게 여기시는구나”를 발견합니다. 그렇게 우리의 생각과 욕망과 삶의 방향이 조금씩 하나님께 맞추어집니다. 그러므로 성경통독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성경 한 권을 다 읽었다’는 성취감이 아닙니다. 말씀을 읽는 동안 하나님을 더 알아가는 것이 진짜 목표입니다.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어도 괜찮습니다. 하루 분량을 놓쳤다고 포기할 필요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계속 말씀 앞에 앉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루하루 말씀을 읽어가다 보면 어느 날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내가 성경을 읽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읽고 있었고, 나를 고치고 있었으며, 나의 인생을 하나님의 이야기 속으로 이끌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Read More
  • 88
    아름다운교회 Aug 02.2026 끊임없이 묻는 사람이 끝내 하나님을 만난다
    우리는 흔히 고민이 없는 삶이 좋은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문제가 생기면 빨리 답을 찾고, 고민을 끝내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조금 다른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답을 한 번에 주시는 분이 아니라, 질문하며 하나님을 찾는 사람을 자라게 하시는 분입니다. 등산을 해 본 사람은 압니다. 정상까지 이어지는 길은 대부분 굽이굽이 돌아갑니다. 처음에는 왜 이렇게 돌아가는지 이해되지 않습니다. 직선으로 올라가면 더 빠를 것 같은데 말입니다. 하지만 산길이 구불구불한 이유는 넘어지지 않고 끝까지 오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가장 빠른 길보다 가장 바른 길을 우리에게 허락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에는 고민이라는 굽은 길이 있습니다. 또 씨앗 하나를 생각해 보십시오. 씨앗은 땅속에서 "언제 싹이 날까?", "왜 아직도 어둠 속일까?"라는 시간을 견뎌야 합니다. 그러나 그 시간은 실패의 시간이 아니라 뿌리를 내리는 시간입니다. 우리의 고민도 그렇습니다. 답을 찾지 못하는 시간이 하나님께서 믿음의 뿌리를 깊게 내리시는 시간일 수 있습니다. 성경 속 인물들도 모두 질문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어떻게 자손을 주시겠습니까?"라고 물었고, 모세는 "제가 누구이기에 갑니까?"라고 질문했습니다. 다윗은 시편에서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라고 부르짖었으며, 하박국은 악이 왜 번성하는지 하나님께 따졌습니다. 심지어 제자들도 끊임없이 예수님께 질문했습니다. 하나님은 질문하는 사람들을 책망하기보다 그 질문을 통해 더 깊은 믿음으로 이끄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고민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닙니다. 누구에게 묻고 있느냐입니다. 세상은 스스로 답을 찾으라고 말하지만, 성경은 하나님께 묻는 사람이 지혜를 얻는다고 말합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약 1:5). 인생은 정답을 외우는 시험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답을 찾아가는 여정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고민이 있다면 그것을 실패로 여기지 마십시오. 그 고민이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게 만드는 통로라면, 그것은 이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질문을 멈추지 마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께 묻기를 멈추지 마십시오. 끊임없이 하나님께 묻는 사람은 결국 답보다 더 귀한 하나님 자신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Read More
  • 87
    아름다운교회 Jul 26.2026 거저 받은 은혜, 거저 받은 구원
    어린 시절 운동회에서 달리기를 잘한 아이에게는 상장이 주어졌습니다. 상장은 실력과 노력의 결과였습니다. 그러나 생일날 부모님이 건네주신 선물은 달랐습니다. 그 선물은 아이가 무엇을 잘했기 때문에 받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부모의 사랑 때문에 받은 것이었습니다. 상장은 노력의 대가이지만, 선물은 사랑의 표현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상장처럼 생각합니다. "조금 더 착하게 살면, 더 많이 봉사하면, 더 열심히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구원을 주시지 않을까?"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구원을 상장이 아니라 선물이라고 말합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에베소서 2:8-9). 사실 인간의 노력으로는 결코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깊은 바다에 빠진 사람이 아무리 팔을 휘저어도 스스로 육지에 올라올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의 몸부림은 물 위에 조금 더 떠 있게 만들 수는 있을지 몰라도, 구원하지는 못합니다. 누군가 배를 타고 와 손을 내밀어 건져 주어야만 그는 살아날 수 있습니다. 구원은 헤엄을 잘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건져 주시는 은혜를 붙드는 것입니다. 한 아이가 큰 빚을 지게 되었습니다. 평생 일해도 갚을 수 없는 엄청난 빚이었습니다. 아이는 밤낮으로 일하며 빚을 갚아 보려고 애쓰지만, 이자는 계속 불어나고 원금은 거의 줄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버지가 나타나 모든 빚을 대신 갚아 주었습니다. 그 순간 아이는 더 이상 빚을 갚기 위해 일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유를 얻은 아들이 되었습니다. 이제 아이가 아버지를 위해 일하는 이유는 빚을 갚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사랑해 준 아버지에 대한 감사 때문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우리는 순종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에 기쁨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인간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올라갈 수 없었기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내려오셨습니다. 우리가 죄의 값을 갚을 수 없었기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값을 대신 치르셨습니다. 우리의 노력은 구원의 원인이 아니라, 구원받은 사람이 드리는 감사의 열매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상장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빈손으로 나오기를 원하십니다. 빈손이어야만 선물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자랑을 내려놓고 십자가 앞에 설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가장 귀한 선물인 구원을 경험하게 됩니다. 은혜는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받아 누리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리고 그 선물을 받은 사람의 삶에는 의무감이 아니라 감사가, 두려움이 아니라 기쁨이, 공로가 아니라 은혜가 흘러나오게 됩니다.
    Read More
  • 86
    아름다운교회 Jul 19.2026 AI시대, 교회는 무엇을 붙들어야 하는가?
    인공지능(AI)은 이제 우리의 일상뿐 아니라 교회 안에도 빠르게 들어오고 있습니다. 설교 자료를 찾고, 성경공부 교재를 만들며, 번역이나 행정 업무를 돕는 유용한 도구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AI를 지혜롭게 활용한다면 사역의 효율을 높이고 복음을 전하는 데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AI가 발전할수록 교회는 중요한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진리로 믿고 있는가?" AI는 방대한 정보를 바탕으로 그럴듯한 답을 만들어 내지만, 그럴듯한 말이 언제나 진리는 아닙니다. AI는 진리를 분별하거나 책임지는 인격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때로는 잘못된 정보를 확신에 찬 말투로 전달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AI가 제시하는 성경 해석이나 신앙적인 조언도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분별해야 합니다. 오늘날에는 누구나 스마트폰만 열면 수많은 설교와 신학 강의, 신앙 콘텐츠를 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보가 많다고 믿음이 깊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정보가 넘칠수록 말씀을 직접 읽고, 기도하며, 신앙 공동체 안에서 함께 분별하는 일이 더욱 중요해집니다. 하나님은 알고리즘이 아니라 말씀과 성령, 그리고 교회를 통해 우리를 성장시키시기 때문입니다. 더욱 경계해야 할 것은 우리가 성경보다 검색 결과를 신뢰하고, 기도보다 기술의 분석을 의지하며, 성령의 인도하심보다 알고리즘의 판단을 앞세우는 것입니다. AI를 사용하는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지만, 그것이 하나님을 의지해야 할 자리를 대신하기 시작한다면 우리의 신앙은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로 한국에서 목회하시는 동기 목사님에게서 요즘 젊은 사람들이 신앙상담을 AI에게 받으라 기도의 자리에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고 하시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AI가 하나님의 자리를 대체하고 있는 것이죠.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때에 수많은 거짓과 미혹이 있을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그 미혹은 노골적인 거짓이 아니라 진실과 매우 비슷한 모습으로 다가올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정보가 많아질수록 성도들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지식이 아니라 진리를 분별하는 영적인 지혜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 14:6)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진리를 가르쳐 주시는 분이시자 진리 그 자체이신 분입니다. AI는 성경을 요약할 수 있지만 말씀으로 사람을 거듭나게 할 수 없고, 기도문을 작성할 수 있지만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를 대신할 수 없습니다. 교회의 생명은 기술이 아니라 말씀과 성령에 있습니다. 시대는 변하고 기술은 계속 발전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마지막 시대를 살아가는 지혜는 뛰어난 기술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변하지 않는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끝까지 붙드는 것입니다. AI를 사용할 줄 아는 사람보다, 항상 말씀 위에 굳게 서 있는 사람이 마지막까지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Read More
  • 85
    아름다운교회 Jul 12.2026 영광을 본 사람은 십자가를 견딜 수 있습니다
    한 마라톤 선수가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결승선이 눈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너무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결승선이 보이는 순간, 다리에 힘이 다시 생기더군요." 결승선을 바라보는 소망이 현재의 고통을 이길 힘을 준 것입니다. 마가복음 9장에서 예수님은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높은 산으로 데리고 올라가십니다. 그곳에서 제자들은 예수님의 찬란한 영광을 보게 됩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고, 하늘에서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그의 말을 들으라"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하지만 이 놀라운 사건 직후 예수님은 다시 산 아래로 내려오십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을 향한 십자가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십니다. 왜 하나님은 십자가를 지기 전에 영광을 먼저 보여주셨을까요? 그것은 영광을 본 사람만이 십자가를 끝까지 걸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등산을 해 본 사람들은 정상에 올랐을 때의 풍경을 쉽게 잊지 못합니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다리가 후들거리는 순간에도 "조금만 더 가면 그 풍경을 다시 볼 수 있다"는 기억이 발걸음을 앞으로 옮기게 합니다. 정상에서 본 아름다운 풍경은 내려오는 길의 피곤함까지도 견디게 하는 힘이 됩니다. 영광의 기억은 현재의 고난을 이겨내는 원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배 가운데, 말씀 가운데, 기도 가운데, 또는 삶의 작은 은혜를 통해 자신의 영광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그 경험은 단지 감동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앞으로 마주하게 될 순종과 희생, 그리고 인내의 길을 걸어갈 힘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사도 바울도 이러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수없이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히고, 배가 파선되는 고난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다"(롬 8:18)고 고백했습니다. 바울이 현실을 몰랐기 때문이 아니라, 현실보다 더 크고 분명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기 때문입니다.그래서 신앙생활은 '감동을 찾아다니는 삶'이 아니라, '보여주신 영광을 붙들고 현실을 살아내는 삶'입니다. 산 위의 영광은 산 아래의 삶을 위한 준비였습니다.혹시 지금 감당하기 버거운 십자가를 지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보여주셨던 은혜를 기억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 영광의 기억은 오늘의 순종을 가능하게 하는 힘이 됩니다. 영광을 본 사람은 현실을 피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장차 나타날 영광을 바라보며 십자가의 길을 기쁨으로 걸어갑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광을 보여주시는 이유는 산 위에 머물게 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산 아래의 삶 속에서도 예수님을 따라 끝까지 걸어가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오늘도 주님께서 보여주신 영광을 기억하며, 우리에게 맡겨진 십자가의 길을 믿음으로 걸어가시기를 소망합니다.
    Read More
  • 84
    아름다운교회 Jul 05.2026 맥추감사절, 첫 열매를 드리는 믿음
    이스라엘 백성에게 맥추절은 단순한 추수 축제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인도하시고 약속의 땅에서 거두게 하신 첫 열매를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절기였습니다. 성경은 맥추절을 "첫 열매를 드리는 절기"(출애굽기 23:16)라고 부르며, 추수의 시작을 하나님께 올려드리도록 명령합니다. 백성들은 가장 먼저 거둔 밀을 자신의 창고에 들이기 전에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이는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라는 신앙고백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농사를 짓는 시대에 살고 있지는 않지만, 맥추절의 정신은 여전히 우리에게 중요한 의미를 전해 줍니다. 우리의 삶에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수많은 '첫 열매'가 있습니다. 건강하게 한 해의 절반을 지나오게 하신 은혜, 가정과 일터를 지켜주신 은혜, 일용할 양식을 공급하신 은혜, 그리고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은혜가 있습니다. 맥추감사절은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돌아보며 감사하는 날입니다. 또한 맥추절은 앞으로 남은 추수까지도 하나님께 맡기는 믿음의 절기였습니다. 첫 열매를 드린다고 해서 추수가 모두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아직 거두지 않은 더 많은 열매가 남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먼저 하나님께 드릴 수 있었던 이유는 앞으로의 수확도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실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감사는 풍성함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신뢰하는 믿음의 표현이었습니다. 어느덧 한 해의 절반을 지나왔습니다. 계획대로 되지 않은 일들도 있었고, 예상하지 못한 어려움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지금까지 우리를 붙드시고 인도하신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남은 시간도 동일한 은혜로 함께하실 것입니다. 이번 맥추감사절에는 하나님께서 이미 베풀어 주신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의 고백을 올려드리기를 바랍니다. 또한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일들까지도 하나님께 맡기며 믿음으로 감사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감사는 지나온 은혜를 기억하는 동시에, 앞으로도 신실하게 역사하실 하나님을 바라보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데살로니가전서 5:18). 올해의 맥추감사절이 우리 모두에게 감사와 믿음을 새롭게 하는 은혜의 절기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Read More

검색


© Areumdawoon Church ALL RIGHT RESERVED. Powered by CROWN MINISTRY